
▲ (왼쪽부터) 로이스 화이트 & 에네스 칸터 프리덤 미국 NBA 선수들, 여성 WNBA 대회 진출 공식화 논란 (사진=스포탈코리아)
"포스트모던적 뿌리에서 피어난 젠더 이데올로기, 인간에게 ‘생물학적 한계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하라고 호소…그러나 절대적 기준을 해체한 자리에 찾아온 것은 자유나 해방이 아닌 극심한 아노미의 혼란"
"진리에 대한 권력의 독점을 막겠다고 등장한 해체주의, 이제는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독재자로 자리 잡은 셈…지금 대한민국의 입법, 사법, 행정 3권, ‘젠더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인 종교적, 윤리적 목소리’를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봉쇄하려는 움직임에 동조"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담론이 황혼을 맞이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존재의 객관적 본질’과 ‘공동체를 떠받치는 보편적 가치’를 겸허히 재발견하는 일"
최근 미국에선 본인을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NBA선수 둘(로이스 화이트 & 에네스 칸터 프리덤)이 여성 NBA대회에 출전을 공식화하고 있어 사회적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이렇게 젠더평등(Gender Equality) 곧 '성평등'은 남성과 여성외 수십여 가지의 성별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태어날때의 생물학적 성별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후천적인 사회적 성별을 우선시하고 있다.
현재 젠더 이데올로기는 다양성, 포용성이라는 빌미로 세상을 떠들석하게 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한국에서도 이재명 정부들어 일방적으로 추진한 성평등가족부, 최근 철회된 대전시의 성평등복지국이라는 국가기관들의 명칭과 정책들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 이은경 변호사 (사진=법무법인 산지)
이러한 시국에 법무법인 산지의 이은경 변호사는 최근 국민일보 칼럼을 통해 젠더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 삼권에 파고들고 있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칼럼에서, 젠더 이데올로기의 뿌리는 20세기 후반 서구 지성사를 흔든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해체적 인식론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 포스트모던 젠더론이 사상적 담론에만 머물지 않고 객관적 실재의 외면과 현실 시스템의 균열, 공동체적 합의의 실종과 새로운 사상적 통제 기제의 등장 등 국가 공권력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 등을 깊이 우려했다.
이하 칼럼 전문.
젠더 이데올로기 포스트모던적 뿌리가 대한민국 삼권에 파고들다.
오늘날 문화, 교육, 법률, 일상의 언어 영역에 이르기까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화두 중 하나는 단연 ‘
젠더(Gender)’다. 생물학적 성의 해체에 이어 개인의 주관적 선언대로 성별을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담론적 힘을 발휘하고 있고, 전통적인 결혼과 가족 제도는 ‘이성애 중심의 차별 질서’라는 이유로 해체의 압력을 받고 있다. 이처럼 주관적 정체성을 절대화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는가? 그것은 20세기 후반 서구 지성사를 흔든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해체적 인식론에 존재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깃발처럼 내걸었던 “거대 서사(Grand Narrative)에 대한 불신”은 생물학적 이분법에 기반한 자연주의적 인간관까지 인위적 질서로 해체하고 말았다. 이들은 진리, 도덕, 지식 그리고 성에 대한 규범까지 특정 시대의 ‘권력 담론(Discourse)‘에 의한 통제 기제로 본다.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규정하는 것 자체를 자연의 법칙 대신 인간의 권력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 젠더평등(성평등)은 남녀외 수십여 가지의 성별을 인정한다.(사진=일부 젠더)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뿌리에서 피어난 젠더 이데올로기는 인간에게 ‘생물학적 한계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하라고 호소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나의 주관적 선택이라는 ‘해방의 서사’를 외친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을 해체한 자리에 찾아온 것은 자유나 해방이 아니라, 극심한 아노미의 혼란이다.
첫째
객관적 실재의 외면과 현실 시스템의 균열이다. 생물학적 사실이나 과학적 보편성마저 ‘사회적 구성물’로 치부하면서 의학, 법률, 스포츠 등 객관적 기준이 필수적인 영역에서 심각한 균열과 마찰이 발생하고 있다.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 XY 염색체를 갖고 있으면서 여자 복싱 경기에 출전한 알제리의 이마네 칼리프와 대만의 린위팅, 미국 대학수영선수권(NCAA)에서 남성부 선수로 활동하다 성전환 후 여성부 우승을 차지한 리아 토머스 등은 큰 파문을 불러온 사례다. 호르몬 치료를 받았다 할지라도 골격과 근육량 등 남성 신체의 생물학적 이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학적 사실이 무시되면서, 수년간 땀 흘려온 여성 선수들의 공정한 기회가 박탈당했다는 비판이 분출했다. 교도소나 쉼터, 화장실 같은 여성 전용 공간에서도 비슷한 균열이 나타난다. 영국에서는 수술받지 않은 트랜스젠더를 여성 교도소로 이감했다가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는 등 개인이 주관적으로 설정한 정체성을 위해 여성의 안전권이 위협받는 기이한 역설이 현실화됐다.
둘째
공동체적 합의의 실종과 새로운 사상적 통제 기제의 등장이다. 보편성을 해체하고 주관성을 절대화하면서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이끌던 최소한의 ‘공통 분모’가 사라졌고, 개인이 주관적으로 정의한 정체성이 타인의 언어와 생각을 강제하는 권력으로 등장했다. 캐나다의 인권법 개정안(Bill C-16)을 둘러싼 논쟁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개인이 원하는 인칭 대명사를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법적 처벌을 가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의 언어와 사상을 통제하는 파시즘적 폭력이라는 조던 피터슨 교수의 반발이 있었다. 더욱이 학문과 문화의 영역에서도 ‘생물학적 성은 존재한다’는 과학적 사실이나 보편적 상식을 말하는 이들이 ‘혐오 세력’으로 낙인찍혀 매장당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횡행했다. ‘해리 포터’의 작가 J.K. 롤링이나 영국의 철학자 캐슬린 스톡 교수가 겪은 사이버 폭력은 주관성을 절대화한 사회가 타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진리에 대한 권력의 독점을 막겠다고 등장한 해체주의가 이제는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독재자로 자리 잡은 셈이다. 기존의 권위를 털어낸 자리에 또 다른 절대 기준을 세워버린 뼈아픈 모순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지점은 이러한 포스트모던 젠더론이 사상적 담론에만 머물지 않고 국가 공권력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입법, 사법, 행정 3권은 ‘젠더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인 종교적, 윤리적 목소리’를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봉쇄하려는 움직임에 동조하고 있다. 국민 개개인의 신념을 사적 영역에 밀어 넣고, 결혼과 가족관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
입법이 “인간의 양심과 언어 그리고 사적 자치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부터 본다.
입법 영역에서 젠더주의를 추동하는 대표적 사례는 ‘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남성과 여성 이외의 ‘제3의 성’을 도입하고,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차별을 시정하겠다는 취지로 발의 중인 법안이다. ‘모두를 위한 평등’이라는 구호 아래 개인과 민간 영역 간의 사적 자치에까지 국가권력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이젠 하나의 이름으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방송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남녀고용평등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각종 개정안에 내용을 나누어 담는 ‘쪼개기 차별금지법’의 형태로도 발의 중이다. 성 다양성 존중, 사실혼 보호, 차별과 괴롭힘 규제 등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제3의 성,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차별 사유로 공식화되면서 남녀의 생물학적 구분 및 결혼과 가족 제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젠더 정체성에 대한 도덕적 비판, 학문적 논쟁, 종교적 가르침, 정치적 의견’까지 차별과 혐오로 단죄할 수 있는 사상적 통제 기제를 띠고 있다. 이처럼 특정 사안에 대한 이견과 비판을 봉쇄하려는 ‘무결성’에 대한 집착은 사유의 틀을 획일화하는 철책과 다름없다. 법의 잣대로 사유의 지평을 가두고 침묵을 강요할 때, 양심과 사상이라는 토양 위에서 꽃피우던 자유로운 담론과 다양성의 가치는 말라 죽고 만다. 무엇보다 이견과 비판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의 발판이다. 표현 금지 목록과 금서로 경쟁 이념을 억누르고 국가적 통념이 개인의 사유를 통제했던 역사의 전례들은, 사상 검열이 낳은 비극을 보여주는 경고등이다. 이러한 집단압력과 동조현상을 법으로 제도화하는 것은 사회 전체를 침묵의 공포로 밀어 넣는 대단히 위험한 시도다.
최근 시행된
개정 정보통신망법도 같은 맥락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과징금 제재까지 포함하는 강력한 온라인 표현 규제 체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물론, 학술, 교육, 언론, 시민사회, 개인 크리에이터 등 공적 온라인 담론을 형성하는 모든 주체는 설교와 강연, 인터넷 칼럼과 학술 논문, 유튜브 영상과 팟캐스트, SNS 카드뉴스와 블로그 포스팅, 언론 기고 및 성명서 등을 통해 ‘제3의 성,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 입장을 표명할 경우, 명예훼손과 혐오표현 등의 이유로 법적제재 위험에 직면한다. 이들을 둘러싼 수많은 표현 중 실제로 법적제재를 받을 수 있는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리는 권한은 사법부의 몫이다. 그러나, 법적 불확실성만으로도 종교적, 윤리적, 학문적, 정치적 견해의 표현에 대한 ‘
위축효과(chilling effect)’는 이미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플랫폼 사업자에게 논란성 콘텐츠에 대한 선제적 삭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민간 영역을 활용해 국가 검열의 효과를 거두려는 간접적 규제라는 비판이 있다.
다음, 사법이 “사회적 합의와 입법적 결단을 어디까지 대신할 수 있는지”를 본다.
사법 영역의 재판 흐름도 앞서 본 우려를 더하고 있다. 대법원은 동성결합 상대방에게 국민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했고, 군대 내 동성 간 성행위에 대해서도 사적 공간과 자발적 의사 합치를 이유로 실정법인 군형법 적용을 제한했다. 또한 기독교 방송의 차별금지법 반대 대담 프로그램에 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징계처분을 승인하거나, 퀴어행사 대관허가 취소를 차별로 인정해 위자료 지급의무를 부과했고,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에게도 성별정정을 허가해 동성(同性)의 부모가 법적으로 성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성과 가족에 관한 기존 법질서의 경계를 대폭 확장하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러한 판결들은 사회적 합의와 입법적 결단이 필요한 문제를 사법부가 해석의 이름으로 선제 결정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마지막 행정은 “국민의 가치관을 어디까지 형성할 수 있는지, 교육과 정책이 가치중립적일 수 있는지”를 살핀다.
행정 영역에서는 정부 부처, 지방자치단체, 교육청, 공공기관이 정책과 행정 지침을 통해 특정 젠더 이념을 제도화하고 있다. 특히 공교육에 미치는 파장은 매우 심각하다. 인권이라는 명분 아래 단일한 성 담론만을 다루는 젠더 교육은, 다양성과 자율성이 존중받아야 할 교육 현장에서 전통적인 성윤리를 배제하고 학생들에게 특정 가치관을 성찰 없이 수용하게 만든다. 아동·청소년의 성정체성 혼란, 성전환 치료의 신체적·정신적 부작용에 대해 서구 사회가 뒤늦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지금, 이는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굳어버린 권위와 가부장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지적 촉매제의 역할을 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의 주관적 욕망을 절대화한 사회는 공통의 언어를 잃은 채 파편화의 나락에 떨어지고, 국가권력이 사상과 언어를 통제하는 역설적 비극을 맞이한다. 특히 “타인을 불쾌하게 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이 감시망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어떤 가치나 삶의 양식이 더 바람직한지 논의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건강한 논쟁과 대화 없이 침묵과 검열만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면, 미래의 희망을 꿈꿀 열정도, 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가치도 힘을 잃고 만다.
결국 이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시각으로 되돌아간다. 인간은 단순히 언어와 권력이 빚어낸 무색무취의 흙 반죽이 아니고, 자신의 성별마저 마음대로 재정의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도 아니다. 성경은 남녀의 차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녀의 인간적 존엄성과 가치의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적 인간론은 삶을 통제하는 억압의 틀이 아니라, 인간을 사사로운 욕망이나 국가권력, 사회적 담론의 산물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로 지켜내는 마지막 방파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담론이 황혼을 맞이한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인간 존재의 객관적 본질’과 ‘공동체를 떠받치는 보편적 가치’를 겸허히 재발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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